Saturday, June 16, 2012

영화 행복(2007) - 삶의 영원한 화두인 죽음

2007년에 만들어진 한국 영화 <행복>을 보았다. 허진호 씨가 감독하고 황정민 씨, 임수정 씨가 주연한 영화다.

이 글에는 영화의 줄거리가 부분적으로 언급되므로 영화를 안 본 분은 읽지 말고, 영화를 보기를 권한다.

난치병 또는 불치병을 앓는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한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사랑, 즉,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다는 존재 간의 깊은 연대감 같은 건 아니고, 지극히 일반적인 남녀 간의 사랑이다. 예쁜 여주인공의 매력에 남주인공(관람자인 나도 포함하여)이 매혹되었다. 서로의 호감을 확인하며 마음 설레였고, 성관계에서 긴장감, 육체적 쾌락과 함께 정신적 일체감을 느꼈다. 서로를 좋아한다고 속삭이고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고백을 나누면서, 지극히 통속적인 사랑일지언정 영혼의 교감 같은 것을 느끼는 듯하다.

깊은 병을 앓고 있는 두 사람이었기에 근처 골목을 걷다 모퉁이를 돌 때에도 죽음의 그림자를 엿본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두 사람은 죽음의 공포와 절망과 함께, 살아 있는 지금의 행복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연인 중 한 사람의 병이 호전되자 그 사람은 다시금 삶에 대한 시각이 바뀐다. 내일을 생각하고, 내일을 대비하려 하고, 자신과는 달리 여전히 아픈 연인의 곤경한 지경에 짜증을 느낀다. 그리하여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죽음을 잊고 밝고 명랑하며 '미래가 있는' 삶을 살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내일'이란 존재하지 않는 허상임을 알지 못하는 일상에서 행복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시며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없다. 양주를 들이켜 봐야 허무함은 메울 수 없다. 육체적, 정신적 쾌락을 추구해 보지만, 쾌락의 시간이 지나면 목마름은 더 깊어질 뿐이다. 결국은 일상에 매몰되어 하루 하루를 보낸다.

병이 호전된 연인을 떠나보내고 남은 사람은 또 다른 고통을 느낀다. 버림 받은 것 같은 느낌, 자신의 존재 의미가 없어진 듯한 느낌을 비롯하여, 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죽음에 대한 정신적 부담이 다시금 깊게 느껴진다. 심심함도 있을 것이다. 외로움도 있을 것이다. 떠나간 연인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보지만 충족되지 않는 목마름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무엇을 느끼고 어떤 깨달음을 얻는지를 보여 주진 않는다. 어쩌면 죽기 직전까지도 깨달음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죽는 순간까지도 '내일'과 '물질'의 허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진정한 평화를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점을 생각해 보면 삶이란 참으로 힘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다와 같은 평화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샘솟는 기쁨은 운 좋게 그냥 얻어지는 법이 없다.

그렇다고 나와 당신의 일상이 항상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다만 무료하고, 활기가 없고, 욕망을 추구하지만 충족되지 않을 뿐이다. 약간의 갈증이라고 할까? 그러한 약간의 갈증 상태가 계속 지속되니까 가끔씩 불같이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린다. 이러다가 약간의 쾌락을 느끼면서 갈증을 잠시 잊는다. 그런 상태이므로 두 연인 간의 유대감은 지속되지 않을 뿐 아니라, 혼자 있을 때보다 화와 짜증이 더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

두 연인이 함께 살기로 결정하며 행복한 미래에 대한 기대에 가득차 있을 때 이 영화의 주제곡인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가 흘러 나온다. 이 노래는 고통스러운 마음을 달래주고 행복의 희망을 갖게 한다. 이 노래에도 행복의 실마리가 들어 있다. 눈을 뜨라는 것이다. 산들바람의 시원함을 느껴 보라는 것이다.


주제가 '행복의 나라로' 듣기

장막을 걷어라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 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
...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이 노래에서 반복되는 부분인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실제로 '행복의 나라'는 저기 어딘가에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내가 있는 이곳은 행복의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저 멀리 행복의 나라로 떠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어디를 가더라도 인간의 원죄, 즉, 스스로 만들어 낸 고통을 자신에게 가하는 행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노래는 행복의 실마리를 보여주는 동시에, 행복을 찾지 못하는 불쌍한 우리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며 엉엉 울고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여전히 나도 행복의 나라를 찾지는 못했다. 그래도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내가 늘 하고 싶었던 것을 해 보자는 생각을 했다.

내가 늘 해보고 싶은 것, 내가 죽기 전에 해 보고 싶은 것은 남태평양의 따뜻한 섬 해변에서 물고기를 잡고 조개를 따서 먹고 살아 보는 것이다. 식량 구하기 힘들므로 칼로리 과잉으로 인한 어처구니 없는 비만이 사라지고, 여러 시간 동안 힘들여 잡은 작은 물고기를 구워 먹을 때 그 깊은 맛과 함께 눈물의 맛을 느끼며, 마실 물이 부족하던 차에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빗물을 온몸으로 느껴 보고 싶다. 그곳이 나의 '행복의 나라'이다. 그러나 그곳은 '행복의 나라'가 아니다.

내 머리속을 계속 맴도는 여주인공의 말을 상기해 본다.
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앞날을 걱정해?
오늘 하루 잘 살면 그걸로 됐지.
그리고 내일 또 잘 살고.
난 나중 같은 거 몰라.

Monday, June 11, 2012

학교 내 폭력, 경찰 신고를 장려하지 않는 학교와 사회가 문제다

서론
학교 내에서 학생 간 폭력 문제의 기본적인 해결책은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방법으로는 잘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학교와 교사는 그렇게 인식하지 않거나, 인식하더라도 자신의 체면이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신고를 장려하지 않는 것 같다. 학생은 아직 성숙하지 않아서 자신의 법적 권리에 대해 잘 모르고 공권력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므로 신고를 잘 안 하는 경향이 있다.

학교와 교사는 학생들을 지도하여 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 학생이 바로 신고하도록 장려해야 하며, 교사가 폭력 사건을 알게 되었을 때는 교사가 직접 고발해야 한다. 능력과 의지가 있는 학부모는 학교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를 하여, 학교가 폭력 사건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자체 해결 또는 경찰 고발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학교 내 폭력의 특성을 살펴보고 그 해결책에 대한 내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단, 나는 관련 법과 실제 판결 사례에 대해 잘 모르므로 이 글에서 법적인 부분에 대해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유의하기 바란다.

가해자는 왜 피해자를 괴롭히는가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만만하기 때문에 어린 치기로, 또는 재미로 때리고 괴롭하며, 그렇게 하더라도 제재를 받지 않으므로 원하는 만큼 반복할 수 있다. 가해자가 악한 인간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일 뿐이다. 폭력 행위에 대한 제재를 가해 주면 그런 행동이 자신에게 손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즉시 깨닫고 자제하게 된다.

교사에 의한 교화로는 해결되지 않는가
현재의 폭력 및 자살 사태를 보면 교화가 그다지 효과적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교사의 교화가 얼마나 효과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현재 고통 받고 있는 학생은 가해자가 교화되기 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고통에서 당장 벗어날 수 있다. 경찰에 신고하여 사법 기관의 힘을 빌리면 된다.

폭력 사건은 형사 사건이다
폭행죄: 사람의 신체에 대해 폭행을 가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5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해진다(형법 제260조 제1항). 
학교 내 폭력에도 형법이 적용될 것 같은데 청소년에게는 예외 조항이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만일 형법이 적용된다면 형사 사건이다. 이러한 형사 사건에 대해 사법권이 없고 권위도 없으며 자기 이익 보전하기에 급급한 학교가 해결할 수 있겠는가? 가해자가 학생이므로 갱생의 기회를 주고 싶다면, 일단 고소만 하고 나중에 합의해 주거나 고소를 취하해 주면 된다(형사 사건은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하더라도 기소가 진행되는 것 같지만 피해자의 용서에 따라 처벌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상당 수의 가해자는 재미로 가해 행위를 한 것이므로 경찰에 한 번 끌려가는 경험만으로도 정신이 바짝 들 것이다. 더욱이 가해자의 부모가 폭력 사건을 알게 되면 자식을 범법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자식 교육에 더욱 신경을 쓸 것이다.

학교 내 폭력을 교사가 고발하지 않는 것은 공무원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형사 사법 포털에 따르면, 고발이란 고소와 마찬가지로 범죄 사실을 수사 기관에 신고하여 범인을 처벌해 달라는 의사 표시로써, 고소와 달리 범인 및 고소권자 이외의 제3자는 누구든지 할 수 있고, 공무원이 직무상 범죄를 발견한 때에는 고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http://www.kics.go.kr/portal/site/public/menuitem.3b195bf463408f2abf9b3102ec2007a0/

그런데 내 지식이 부족하긴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학교 내 폭력을 교사가 경찰에 고발하는 것 같지도 않고, 교사가 고발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징계를 받지도 않는 것 같다. 학교는 학교 내에서 폭력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지도할 수는 있으나 일단 발생한 형사 사건은 사법기관이 아닌 학교가 해결할 능력이 없으므로, 교사는 폭력 사건을 파악하여 경찰에 고발해야 하며 고발하지 않는 것은 공무원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부모 또는 기타 관련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학부모 또는 기타 관련인은 학교 내 폭력을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또한, 교사가 폭력 사건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신고하지 않는 것을 비난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 학교를 상대로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것이 좋겠다.

참고 자료:
학교 폭력의 피해 학생은 가해 학생, 그 감독의무자 및 학교 등을 상대로 손해(치료비 및 위자료 등)에 대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http://oneclick.law.go.kr/CSP/CnpClsMain.laf?popMenu=ov&csmSeq=254&ccfNo=1&cciNo=1&cnpClsNo=1

학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회 시간에, 학생이 맞거나 돈을 갈취당하면 112에 신고하라고 안내한다. 그 학교에서 신고가 한 3건 정도, 또는 10건 정도만 이루어지면 앞으로 그 학교는 학교 폭력이 상당히 잠잠해 질 것이다. 교사도 학생이 맞은 사실을 알게 되면 신고해야 한다. 또한 폭력 사건에 대해 생활기록부 등에 상세하게 기록하여, 향후 진학 시 고려 사항으로 제시해야 한다.

학생이 그 누구로부터도 폭행을 당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안내한다. 다른 학생뿐 아니라, 교사, 부모 또한 학생을 때릴 수 없다는 점을 안내한다. 가끔 단체로 구치소 또는 교도소를 방문하여 봉사 활동을 하며, 폭력 또는 갈취는 죄이며 그 결말은 법적 제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교육한다.

117 학교 폭력 상담 전화는 도움이 되는가
피해 학생은 일단 117번으로 전화하여 상담을 한 번 받아보라. 상담원이 실질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지 들어 보라. 그러나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으면 112로 전화하는 것이 효과적이겠다. 117 상담원은 기본적으로 사법권이 없으므로 형사 사건을 해결할 능력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전화는 한 번 해 보기 바란다.

관련 법률 참조 자료
법제처에서 운영하고 있는 다음 사이트에서 학교 내 폭력에 대한 관련 법률이 소개되어 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http://oneclick.law.go.kr/CSP/CnpClsMain.laf?popMenu=ov&csmSeq=254&ccfNo=1&cciNo=1&cnpClsNo=1&menuType=cnpcls

맺음말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학교 내 폭력은 교화 등 기존의 다른 여러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제는 국가, 즉 사법권의 힘을 빌리도록 하자. 법적 대응을 통해 가해 학생을 교화하고 무책임한 학교를 정신차리게 할 수 있다. 그러한 법적 대응 풍토가 정착되면 겁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학생이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법대로 하자.